그 내밀한 거룩으로

2025. 10. 12. 23:4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민15:37~4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는 거룩한 여호와라. 나희는 내 앞에서 거룩하라.'고 요구하였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요구하는 거룩함,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예수와 함께 지낼 때 제자들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컀으며

나병환자를 깨끗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자시 죄를 이기는 능력은 아직 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았 때, 그들도 예수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도 능력이지만 더 큰 능력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1. 지성소 한가운데로

성령을 받으면 예수가 한 일을 우리도 똑같이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생들이 된다는 말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바로 이것이 구약 시대의 신앙인들이 받지 못한 신약 새 언약 시대를 사는 우리의 특권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애 아버지의 뜻, 즉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4)

중요한 것은 우리도 죄의 유혹을 극복하고 이기는 길을 예수가  열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우리 앞에 열어 놓은 그 길은 ‘새롭고 산 길’이라고도 불린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10:19~20)

휘장 가운데, 즉 지성소라는 성소 중에 가장 거룩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그곳을 가린 휘장을 예수가 찢고 그 길을 열어놓았다.

이는 우리도 지성소 안 하나님의 거룩에 참예할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예수가 앞서 그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갔으니

이제 우리도 예수를 뒤따라 거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도 그 예수의 본을 바라보며 거룩으로의 경주를 하고 있다.

이미  예수가 휘장을 찢었으니 우리는 그 휘장을 또 찢을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수를 뒤따라 열려 있는 그 길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십자가를 진 예수를 뒤따라 우리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내 현실의 계산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휘장 한가운데,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예수 자신도 당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모습, 즉 죽음을 통해 거룩을 나타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의 거룩이 우리 삶에 투영되고 경험된다.

그렇게 살도록 내주 하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간다.

그러니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해 가는 그리스도의 영이다.

 

2. 거룩으로의 참여 

그런 삶을 살수록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간다.

예수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참예하여 지성소로 들어갔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니 곧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구원이라는 것의 현실적 실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의 참여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3~4)

 

예수를 믿는다 해서 거룩한 삶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주 하는 성령의 인도로 온전한 삶을 살려 애써며 달려가야 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얻었으나 '성화'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따라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점차 온전한 거룩에 이르게 되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며

자기 양심의 죄로부터도 벗어나는 거룩한 삶과 정서를 경함 하게 된다.

이런 삶을 살았던 예수였기에 그는 언어생활에서부터 거룩하였다.

더러운 말, 과한 농담, 속이는 말이 예수의 입술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언제나 말씀에 근거한 진실을 말했을 뿐 한 번도 허황되거나 헛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상한 이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을 예수께 들어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예수는 유산 상속 문제나 경제 문제 같은 사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부분 영생이나 하나님 나라라는 천국을 주제로 말하고 가르쳤지

현실 세상에서 요령 있게 사는 처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

오직 당신의 입술을 거룩하게만 사용하였고 또 지켰던 것이다.

예수의 이런 거룩은 어려서부터 말씀으로 세워온 그의 ‘내면적’인 것에 근거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거룩’의 개념을 외형적으로 기준 삼아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보이는 것들, 즉 음식을 가려 먹고  의복을 가려 입으며 장소를 가려서 거룩을 따졌다.

그러니 예수가 '거룩한 삶을 살았다' 함은 금욕적이거나 은둔적 삶을 말함이 아니었다.

예수는 당신의 일상에서, 즉 당신의 현실 삶 한가운데서 거룩하게 살았다.

무슨 특별한 옷을 입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특별한 옷이나 특별한 장소를 구분하여 다님으로  당신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3. 내밀한 거룩

그것이 어디 옷뿐이었겠는가? 먹고 마시는 음료나 음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예수는 먹고 마시는 일로 즐거움을 삼았었다.

즉, 그의 거룩은 금욕주의적 거룩이 아니라 내면적인 거룩이었다.

다만 예수는 먹는 일로 즐거워했지만 식탐가는 아니었다.

혹 식탐가였다면 40일 금식한 후에 광야의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예수는 경건한 신분들과 어울렸지만 실패자라 낙인찍힌 이들과도 주저없이 어울렸다.

하지만 어울리되 그들의 죄성에 오염되지 않았다. 그의 내면은 언제나 거룩하였다.

바리새인들처럼 세상 속물들과 격리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았고

사두개인들처럼 현실 권력과 야합하거나 그 권력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거룩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상 삶에서 구체화 되었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이미 12살 즈음에도 상당했었다.

그것은 그가 어릴 적부터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했다는 뜻이다.

예수뿐 아니라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그들은 수시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되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았다.

말씀을 깨닫는 것에 있어 먼저는 그렇게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는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 순종적 삶을 통해 말씀 지식은 그에게 날 선 검과 같은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광야의 시험 때 사탄을 그 말씀의 검으로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에 대중들 앞에서 가르칠 때 종요 엘리트들과 달리 그 말씀에 큰 권위가 있었다.

그의 말씀 이해와 해석, 그리고 그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예수였기에 그 말씀 지식으로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배타성을 들추어 비판할 수 있었다.

사두개인들의 설득력 있는 논리에도 그들에게 이미 지옥이 예비되어 있다고 일갈할 수도 있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예수는 당신의 말씀이라는 설교를 통해 대중의 인기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말씀 중 일점일획만 슬쩍 피하거나 완곡하게 해석했더라면 마찰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의대로 전하여 다가올 고통과 괴로움 앞에 직진하였다.

좋은 것이 좋다고 대충 봉합하여 넘기거나 화합을 위하고자 모진 말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말씀대로 주저 없이 선포했기에 예수의 대적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22:16)

 

결론

거룩을 추구하는 우리는 살면서 무엇에 분노하는가?

성경은 노를 발하는 것을 죄라 하였다. 하지만 훼손되는 거룩에 방관함도 죄라 하였다.

예수에게는 거룩한 삶이 우선이었지 사람들의 체면, 사정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성전, 하나님의 집이 물질적 이해관계로 더럽혀질 때 예수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성품상 화를 낸 적이 없던 예수였으나 채찍을 들어 성전 오염자들을 치고 몰아냈다.

그렇게 온유했던 예수였지만 하나님의 집이 오염되는 것에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세상에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예수는 그 검을 사용하였다. 말씀이라는 그 검을 우리에게도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거룩을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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