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19. 20:0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 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삿6:19~24)
세상에 나대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저마다 자기에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자기 하는 일, 또는 하려는 일들의 명분을 삼는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용사는 상황이나 조건, 처지나 능력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맡긴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는 말도 안 되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통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을 이룸에는 숫자만이 능사가 아니다. 하고자 하면 단 한사람으로도 족하다. 그 단 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예수였다.
1. 세상의 용사들
오늘날 한자락 한다고 떠드는 땅의 용사들은 어떤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숫자, 조건, 능력으로 일의 성패를 가늠하여 한다. 그런 것으로 자기와 사람의 가치까지 가름하려 한다. 그러니 그런 세상 용사들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2:11~12) 여기 외모는 사람 겉모양을 말함이 아니다. 보이는 행위, 규모, 세력을 의존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이나 지혜, 그 사람의 능력을 근거로 택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와 당신의 능력을 부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 삶의 원리는 내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방식이고 세상 현실 삶의 원리는 서로의 이익과 각자의 생존을 위해 인위적으로 뭉친다. 그러니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인 우리에게서 그런 인간적 계산, 잔꾀를 부순다. 바벨탑에서 인간들이 뭉쳐 하나 되고자 했을 때 일면 기특한 시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힘을 합친 동기가 자기들 유익을 위한 것이었기에 결국 죄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이 불러 모은 32,000명을 모두 흩어버렸다. 그리고는 300명을 남겨 그들 손에 나팔과 항아리를 들려 전선으로 내몰았다. 당신의 일은 숫자나 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사기는 세상 용사들과 하늘 용사들을 대조한 소개로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사사들 삶을 소개한 책이다.
아울러 그들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사사들이 모형으로 보여준 예수와 십자가, 그리고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 예물을 가져왔었다. 그 예물이 무엇이었던가? 어린 염소와 무교병이었다. 이 특이한 예물은 유월절을 상기시킨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1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14일까지 간직했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출12:5~7) 이는 기드온 이야기를 여호와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결시킨 것이다.
2. 반석의 불
어린 양이나 어린 염소, 그리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은 무엇을 뜻인가? 인간의 힘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열심을 가리킨다. 이것이 이 기드온 이야기를 통해 그 출애굽 이야기를 반복하고 이유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그 예물을 받고 불에 살라졌다 함은 그것을 흠향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르되 반석의 불로 태웠다. 즉 그 예물이 단순한 염소 새끼와 무교병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말로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23:19) 제물은 제단 위에서 태워질 때 가치가 있다. 그 자체로서는 단지 한 마리의 염소요 양이다.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한 창세전 언약 속에서만 가치를 발한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예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 의해 불살라진 예물을 받았다. 그런 자리, 그런 삶에서 평화, 즉 여호와 샬롬이 찾아온다. 진짜 평강은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말이다. 여기 불을 뿜은 ‘반석’은 히브리어로 ‘쭈르’인데 ‘보호하다, 품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갈증으로 죽을 위기 때 물을 내 그들을 살린 것도 ‘쭈르’였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출17:6) 한 때는 반석에서 불이 나왔고 또 한때에는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 그 물과 불은 같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곳도 그 반석 틈이었다.
죽어야 할 것들을 보호하고 살려내는 역할, 숨은 바위틈도 반석이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33:21~22)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도륙하고 숨은 바위틈도 반석이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멈추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삿15:7~8) 그래서 바울은 그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자신 있게 밝혔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4)
3. 생수 그리스도
예수도 당신을 가리켜 생수를 내서 죽어야 할 자들을 살리는 반석으로 표현했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7:37~39) 갈증으로 죽을 자들이 생수를 마시고 살아나면 그 배에서 생수가 흐른다. 다른 말로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니 그 생수가 바로 성령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성령을 종종 불이라고도 표현해왔다. 반석과 그 반석에서 나온 불은 예수와 십자가로 교회에게 주어지는 성령이었다.
이는 자격 없던 우리가 예수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기쁜 예물이 된다는 복음이다. 반석이 두들겨 맞아서 물을 내고 그 물이 죽을 자들을 살려내는데 그 물이 성령의 불로 교회를 창조해내는 것이 새 창조 내러티브이다. 이는 구약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줄곧 예언되어 왔던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사55:1~2)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나 반석의 불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 은혜를 가리킨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는 그 많은 반석 이야기들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21:5~7) 결국 성경에 나오는 반석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 창조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 새 창조는 예수의 희생과 은혜로 우리에게는 대가 없이 주어졌다.
결론
그래서 세상 용사로서의 기드온이 죽고 135000 앞의 300이라는 하늘의 용사로, 비워진 그릇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이 '여호와 살롬'이라는 삶이었다. 구원 사건을 숫자로 헤아리기에 믿음의 햇수, 년차, 교회 직분 서열들을 따지는 인생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조차도 규모와 양으로 내밀어 자기 믿음의 정도를 측정하려 한다. 숫자나 규모나 서열, 년차나 행적을 사모하고 신뢰하려는 세상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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