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9. 11:4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6~28)
하나님은 왜 사람을 창조했을까? 심부름시킬 종이 필요해서였을까? 일을 시킬 목적이라면 이미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따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당신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보여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본적인 시선을 놓치니 사람들이 종종 구원에 대하여, 그리고 신앙의 이유에 대하여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를 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 아니 세상을 창조한 목적도 자시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곁길로 빠지는 것이다.
1. 그의 형상과 모양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할 때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말했다. 그렇게 만들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 아담이 범죄 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조도 전에 이미 메시아를 보낼 것과 십자가, 그 죄로부터 구원 섭리를 작정하였다. 이렇게 창세전에 미리 작정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역, 그것의 주요 목적이라는 그 일련의 계획들도 인간을 창조한 목적, 즉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감에 포함되어 있었다. 죄로 인한 오염에서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이라는 상태로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 그래서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라는 과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창세기와 아울러 바울의 로마서에도 이런 하나님의 스케줄이 확인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8~29)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구원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담의 죄로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즉 신의 성품으로의 회복이 목적이었다. 그런 성품의 회복인 구원은 내 삶의 여정, 즉 믿음이라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져 간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을 단지 ‘아는 믿음’이라는 성경 지식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 속에 회복하는 것'에까지 눈이 열려야 한다.
바로 그것이 성령 하나님으로서 진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구원은 내 결단이 아니요 몰랐던 무엇을 배워서 얻는 것도 아니다. 성경 지식으로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구원은 신비한 역사이다. 말씀을 통해 내면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는 초자연적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가 ‘두 번째 아담’이었기 때문이요 그가 또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담이란 실패한 첫 번째 아담을 대신함이요 성공한 모델이라는 말이다. 특히 ‘아담’이란 말에 유의해야 함은 그가 우리 인류의 본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란 뜻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2. 하나님처럼의 오해
그렇다면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너희들도 나처럼 살 수 있어!’ 이런 완벽주의를 뜻함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성품, 신의 성품으로 되어 감을 뜻한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하나님이라면’ 하는 신랑 시선에서 생각해 보면 시선이 분명해진다. 신부인 우리에게 신랑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혼수로 가져올 많은 물질이겠는가? 아름다운 모습이겠는가? ‘부리는 영’들인 천사들을 부리는 분이요 만물을 만든 분이다. 그런 분에게 재력이나 미색은 의미가 없다. 신랑 하나님이 신부인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 성품이다. 당신의 성품, 오직 그 하나를 원한다.
혹여 신부의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준비되지 못하면 그 ‘연합’이라는 혼인은 결국 파경에 이른다. 서로 안 맞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한다. 그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온 예수는 그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도록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삶과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본래 하나님은 시험에 실패하지 않고 유혹에 넘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예수도 마귀의 시험을 받았지만 거기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1) 하지만 이 시험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감당해 낸 시험이었다. 인간 예수로서 유혹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어낸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인성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동시에 믿는다. 그의 신성을 부인하면 이단이지만 그의 인성을 부인해도 마찬가지로 이단이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졌음에도 죄를 짓지 않고 악의 유혹을 이겼다. 그것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을 보여주었다. 신성을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인성을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신앙, 즉 믿음 생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경배함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예수를 두 번째 아담으로 그의 삶을 따르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3년 공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삶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3. 나의 구원을 넘어
예수가 세상에 온 목적이 단지 나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만이 그 목적이었다면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 많은 계명들을 부여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그것만이 전부였다면 그의 공생애가 굳이 3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그가 구원 사역을 이루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은 1주간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공생애 3년 반을 살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삶의 태도와 방향을 보였다. 구원 목적이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었기에 구약에 그 많은 계명들이 나왔던 것이다. 그 방대한 구약 계명들의 신약판 계명이 예수의 산상수훈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즉 천국 삶의 원리였다.
그래서 또 다른 하나님인 성령도 당신의 사역으로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대체로 사람들은 예수 본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겨 처음부터 포기하곤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이 어찌 사람으로서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성령이 내 약함을 돕는다. 도와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게 내 삶을 이끌어 간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구원 받은 이후에 내주 하는 성령은 계속하여 예수의 영광,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가게 한다.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거울처럼 환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도록 사역해 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8~29) 이런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볼 때, 내 삶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환경들은 나를 빚고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함, 즉 구원을 이루어감이다. ‘구원’이란 어떤 위험한 상태, 즉 지옥으로부터 구출이다. 하지만 내 ‘구출’이라는 소극을 넘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더 적극적이고 근본적이며 광의적이다. 그 형상을 닮아갈수록 하나님과 교감이라는 충만을 누리게 된다.
결론
‘인류역사는 군주나 장군이 아니라 성자에 의해서 변화되어 왔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어떤 정치적 힘도 아니요 경제적 힘도 아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이다. 정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서 선팩의 효능감을 느끼는 세월이나 큰 특에서 큰 변하는 없다. 그러나 성자는 다르다. ‘13세기의 성프란시스가 당시 타락한 교회를 구했다’는 말도 있다. ‘구원’이란 이 현실 세상에서 천국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다. 지옥 같은 삶, 죽지 못해서 억지로 사는 삶이 아니다. 100평 아파트에서 산다고 천국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가 고위 권력자라고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가 있을 때 거기서부터 천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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