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선함이 무엇인가?

J-요한 2022. 4. 2. 22:34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성경은 말한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옳다고 여겼고 선한 일이라 생각하여 선택해왔던 가치관이 무너질 때가 있다. 더구나 하나님의 정의는 살아있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그 선택, 그 믿음이 무너지는 참담함을 겪을 때가 많다. 그래서인가? 어떤 이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끝까지 참으니 참다가 끝나더라! 나쁜 걸 참다 보니 좋은 걸 잊어가더라!" 선의로 살려고 애쓰다가 실망한 이들의 말들이다. 세상 현실을 사노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경건한 이들은 이 세상에 선을 행하는 자 없음을 탄식하며 살아왔다.

 

1. 선함 컴플렉스

인간은 정말 선을 미워하고 악에만 기뻐하는 존재일까? 그렇다 한들 어쩌겠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선으로 살라 하였으니 말이다. 아니 그럴수록 더 선한 삶을 살라고, 빛의 자녀로 살라고, 그래서 신의 자녀 다움을 잃지 말라 하였다. 작가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말한 바 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선함이라는 것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내 곁에 함께 있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영원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금'을 외면한 영원은 환상이고 착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선은 지금 여기서의 향유이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서 말했다. "좋은 단지를 가지고 있다면 오늘 사용하라. 내일이며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 좋은 것을 아끼지 말라는 것, 옷장 속 새 옷 예쁜 옷을 아끼지 말라는 것, 잔칫날이나 결혼식장에 입고 갈 것이라고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 옷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마음도 아끼지 말자. 사랑스러운 마음과 그리운 마음을 좋은 사람 생기면 그때 주겠다고 아끼지 말자. 그러다가 어느 사이 마음의 물기가 마르면 노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이다. 항상 느끼지만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런 면에서 종교의 핵심은 나를 바꿈이고 그 바끈의 핵심은 사랑의 삶이다.

 

사랑은 말이나 이론보다 그렇게 사는 삶이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웬만큼 살만하게 되었다면 깍쟁이 근성을 버려야 한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으려 말고 물건 질을 따지지 말며 부르는 대로 주고 사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어느 늙은 성직자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50년이나 걸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말에서 '머리'는 실천 없는 관념의 사랑이었고 '가슴'은 그 관념에서 벗어난 구체적 삶이었다. 사랑과 자비를 설파해왔던 그였지만 정작 그것이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그렇게 멀었던 것이다. 작은 사랑이 큰 사랑이고 실천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삶은 그렇게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선함이 다른 것이겠는가? 가슴으로 사는 이런 삶이 선함이다.

 

2. 빛의 열매로서

전도자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 (전3:12)고 고백하였다. 선을 행하는 것도 좋지만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의미로 기도하였다. "모든 선을 기뻐함으로 이루게 해 달라“ (살후1:11) 기독교인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이다. 거룩한 의무인 것이다. 행하되 그것을 기쁘게 행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를 넘어 '열매'이어야 가능하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5:22-2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여섯 번째로 '양선', 즉 선함, 선행, 혹은 선이 호명되어 있다. 열매는 기쁨이다.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추수하는 기쁨을 어찌 잊겠는가.

 

바울은 이런 선을 '빛의 열매'라 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5:8-9) 빛이 열매를 맺게 한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빛을 통한 광합성으로 존재하는 이치, 그래서 바울은 그 빛이 맺는 열매로 '착함, 의로움, 진실함' 세 가지를 나열하였다. 그 중 첫째가 착함, 즉 선이다. 선은 빛이 만드는 첫 번째 열매이다. 은밀히 행한 것들,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 책망받을 것들이 이 빛에 의해 드러낸다. 그러나 그 빛에는 깨끗케 하는 치유의 힘이 있다. 많은 질병들이 햇빛을 쏘이는 것만으로도 나을 수 있음은 이미 상식이다. 햇빛의 치유 능력도 그러하거늘 빛으로 온 그리스도는 어둡고 부끄럽고 책망받을 것들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깨끗이 치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 삶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의 열매를 맺게 한다.

 

기독교인이 빛이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다. 나를 빛되게 한 이유도 캄캄한 세상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 이야기는 세상에 작은 등불 하나의 소중함을 시사한다.  필라델피아에 살았던 그가 살던 당시에 밤이 되면 온 세상은 캄캄했다. 벤저민은 작은 등을 하나 사서 집 앞 등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해가 져 어둠이 거리를 덮자 그 등에 불을 밝혔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프랭클린 집 앞에서 길을 비추고 있는 따스한 등불의 혜택을 보았다. 그 집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길바닥에 솟아오른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후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자기 집 앞에 등을 내놓기 시작했다. 훗날에 필라델피아는 가로등으로 밤거리를 환하게 밝힌 미국 첫 번째 도시가 되었으니 이것은 가로등의 시초였다.

 

3. 악은 선의 결핍

세상이 더럽고 어둡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작은 등잔이라도 하나씩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 하루하루 선하게,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세상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인생은 이런 선한 일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예수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준 이유도 나를 깨끗케 하여 선한 삶을 사는 인생이 되게 하려 함이었다. 나를 지음에 목적이 있었고 부르심에도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을 준 이유도 이런 능력을 갖게 하려 함이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으로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하지만 하나님은 선을 행하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단지 선이 무엇인지 자세하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성경 속의 예언자들이 이 사실을 전해왔다. 1년 된 송아지도,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도 기뻐하지 않는다 하였다. 다만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으니 여호와가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함이라 하였으니 그런 인생길, 그런 삶이 선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악의 기원을 알 수가 없다. 선한 하나님이 창조한 선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합리적 설명도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악의 극복은 가능하다. 기독교는 악을 선과 동등한 실체로 이해하지 않는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설명함은 기독교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다만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어거스틴의 표현에서 설득력을 느낀다.

 

그가 말한 것처럼 악은 선의 부재요 결핍이다.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았을 때, 가인의 안색이 변함을 보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를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선을 행하지 않으면, 즉 선이 부재하면 악이 자라나서 지배하게 될 것이니 꾸준히 선을 행하라는 것, 행하되 잠시라도 악이 자라날 틈을 주지 말라는 말이다. 악은 선이 희미해지거나 부족할 때 마음 한 구석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그러므로 이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7)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다.

 

결론

내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고 사랑으로 살며 하나님과 동행함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삶이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2:6-7) 뿐만이 아니다. 예수도 이렇게 말해주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9) 그러니 선함에 지혜롭고 악에 미련하자. 대가를 기대하고 행하는 선은 오히려 근심의 씨앗이다. 선을 행하되 완벽하게 하려 말고 의를 행하되 철저하게 하려고도 말자. 다만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열매를 거두리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엡5: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