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 불안한 삶에서

J-요한 2025. 6. 29. 12:58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37:3~6)

 

예수의 이름에 늘 붙어 다니는 ‘그리스도’라는 호칭, 우리가 입버릇처럼 부르는 ‘그리스도’라는 그 호칭에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 예수를 믿는 우리 자신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칭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시선,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그의 삶을 따라 사는 자들이라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독교인의 삶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확정되고 보장되어 있다.

 

1. 왜 불안한가?

그런 그리스도인 신분임에도 종종 삶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걱정과 불안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삶의 불안은 두려움과 조바심을 낳고 경쟁과 분열, 심하면 전쟁으로 치닫게 한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확정되고 보장된 인생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경쟁과 분열과 두려움, 외로움과 조바심이 일상이 되어가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겠다 했던 인간들, 그 후로부터는 정말 자신에 내재된 제한적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지키고 인도하는 하나님을 상실했기에, 아니 믿지 못했기에 그때부터 스스로 자기 행복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나은 지위를 얻어 강자로 서고 싶었고 쟁취하고 이루어낸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걸고 달린다. 살면서 느끼는 인간의 모든 종류 불안은 근원적으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인생들이 자기 사는 지금 처지에 대하여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처지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좁은 의미로는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이고 넓은 의미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의 가치나 영향력이다. 그러니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나 자기 성공을 목적으로 사는 한 늘 불안할 수밖에 없고 항상의 조바심으로 살 수밖에 없으니 전쟁 같은 경쟁의 삶에서 인생이 고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종종 타인에 의해 자기 처지를 자리매김 해 놓고서는 정작 스스로는 자신의 낯선 모습에 당황하곤 한다. 정말 그것이 내가 맞나? 진짜 ‘나’는 ‘나’만 안다. 문제는 타인들이 진짜 ‘나’를 잘 모르고 드러난 ‘나’를 내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에 의해 규정된 내 사회적 위치 그 자체로 나를 규정하니 실제 나는 사라지고 내 처지, 내 지위가 곧 나를 말해주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 그 피상적 ‘나’가 내 자신에게도 진짜 ‘나’로 규정되어 가는 것이다. 대체로 높은 지위의 인생은 명성뿐만 아니라 존경까지 받기에 다른 인생들의 귀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도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를 그렇게 세뇌해 가는 것이다.

 

2. 소외의 두려움

반면에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여 결국 세상으로부터도 외면 받아 스스로도 자기 존엄성을 폄하하게 된다.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그의 소유와 지위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인생들이 남들보다 작아지지 않으려 애쓰고 현실 세상에서 자기 존재감을 알리고 높이려고 고군분투하게 된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이것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은혜를 떠난 인간들의 일상이다. 결국 인간들의 불안은 다른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함께 사는 법, 같은 자녀로서의 연대를 상실함에서 야기되었다. 남들과 비교하여 더 나은 처지에 서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은 바람, 또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 불안은 은혜를 떠난 인생들이 타인들과 함께 사는 방식의 상실에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자기 외의 사람들을 경쟁자로 삼기 시작한 인간 역사는 오래 전부터였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경쟁자로 여겨 때려죽이고 난 뒤 하나님 앞에서 처음 한 말이 무엇이었던가? ‘누가 저를 때려 죽일까봐 불안해서 못견디겠습니다’ (창4:14) 그렇게 은혜를 떠난 인간의 역사는 불안의 역사였다. 그 불안의 역사는 낮은 지위에 속함이 곧 불행이라고 가르쳐 왔다. 이 왜곡된 배움과 그로밍으로 인해 인간들은 높은 지위를 얻고자 싸워왔다. 하지만 그 오랜 싸움과 노력에도, 그래서 마침내 얻었음에도 불안은 오히려 늘어갔으니 아이러니이다.

 

왜 그럴까? 여전히 인간들이 최후의 승자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빠져나간 그 공허의 자리, 거기에서 기인된 인간 욕망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강한 자라고 누가 정의하였나? 부자가 승리자라고 누가 손을 들어주었나? 마귀였고 그 마귀에 휘둘린 인간들이었다. 그 마귀에게 교육된 이 세상이 자기들끼리 합의한 테제들이다. 하나님은 이기는 것이 강함이라는 공식을 준 적이 없다. 하나님이 준 것은 오히려 십자가였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세상에게 맞아 죽음이다. 그렇게 죽었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승리였다는 사건, 그것이 십자가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교회는 어찌하여 이기기 위한 쟁탈이 만연한가? 어찌 ‘나는 당신들과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는가?

 

3. 자가당착의 함정

키 작은 사람은 같은 키의 사람들 틈에 있으면 자기 키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키 큰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키 작은 사람들은 긴장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 내가 남만 못하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불안,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절대 평등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고 있고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평등을 말하면서도 사소한 불편을 감수하지 못하고 작은 손해를 참지 못한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내가 모순인 것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하나?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렇게 남들보다 '튀어야' 한다는 강박이 오늘의 우리를 더 불안으로 이끌어 병들게 만든다. 최고를 향한 ‘1등병’이 오히려 인간들을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1등병’이 인류 문명을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음도 사실이다. 과학의 발전과 경제 성장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까지 넓혀주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문제도 같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의 세상에서는 내 처지가 혈통, 가문,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특히 경제적 능력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함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런 능력 위주의 세상이 높은 지위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해 주지만 낮은 지위의 약자들에게는 무능력, 사회적 박탈감, 수치심을 안겨다 주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은 곧 자신의 무능력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런 인생은 더 이상 이 세상, 현실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다.

 

서양 중세 때까지만 해도 가난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자와 빈자는 신이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각자 현실 세상 속에서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가난한 농민의 삶은 한가한 귀족들과 비교하여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박탈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가난한 자에게는 물질적 궁핍에 정신적 고통까지 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가문이나 됨됨이가 아닌 외적 힘의 소유를 가졌느냐 아니냐, 그런 것으로 그 인생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무능력에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세상은 그런 이들에게 실패자라는 암묵적 꼬리표를 달고 있다. 오늘의 경제 약자들은 결핍으로 인한 불편에다가 불안까지 안고 사는 것이다. 

 

결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경제력이 인간의 불안에 끼친 영향은 가난한 사람들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서로 더 나은 지위를 얻으려는 경쟁심 또한 그만큼 늘어났다. 지배계층은 자신들이 가진 사회 경제적 지위를 잃게 되지 않을까, 혹 다른 이가 더 성공하여 자기가 왜소해지지 않을까, 성공한 이들은 그들대로의 불안 또한 크니 그 두려움이 장난이 아니다. 더 센 자, 더 성공한 자가 나를 우습게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한다. “내 백성들아! 거기서 나오라! 그 애굽에서, 그 바벨론에서 나오라!” 신앙은 이 불안 순환에서 벗어남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계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