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요한 2025. 6. 15. 14:50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35:6~10)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성경 이야기가 잘못 이해되는 경향들이 많다. 사람들은 ‘믿음’을 단지 ‘지식’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그 길을 따르고 있다. 그 결과, 성경을 일고 연구하여 스스로 구원받은 줄 알고 마음 놓고 있는 것, 그것은 마귀가 주는 미혹이요 거짓 평안이다.

 

1. 듣지만 순종은 없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삶이 있다. 어떤 삶을 가리키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거리가 먼 삶, 성숙과 멀고 변화되지 않는 삶, 아니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이다. 그렇게 사는 삶은 ‘바벨론’ 성을 건설하는 삶이다.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6) 여기 ‘행함’이란 인간의 자기 공로를 뜻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뜻하니 말씀과 연결되는 ‘행함’이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그러나 이런 ‘행함’이 없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짓는 집’이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여기 ‘모래 위에 짓는 집’은 세상 불신자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 인생들은 이미 성경 말씀에서 논외이다. 여기서는 말씀을 듣는 자들, 즉 신자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 신자들, 말씀을 듣는 자들 중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기도도 하며 집에서 성경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내용들을 ‘행하지 않은, 순종하지 않은’ 신자들이다. 예수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만 구원의 근원이 된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9)

 

믿는다는 것은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걸어간 길을 따름이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요일2:6) 마7장 마지막에 나오는 두 집,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들, 여기 두 집은 짓자마자 바로 무너지지 않는다. 둘 다 한 동안 굳건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어느 것이 굳건한 집인지 육안으로 분별이 불가능하다.그것의 기초가 땅 속에 있기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바벨론과 예루살렘은 똑같이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상징적으로 말세에 나눠질 신자 두 그룹이 이렇게 그려졌다. 환란의 비바람, 또는 최후 심판이 닥칠 때까지는 구분이 쉽지 않다.

 

2. 말씀 없는 인생들

세상에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모에 더 신경을 쓰는 인생들이 있는 반면 자신의 신앙적 내면에 더 신경을 쓰는 인생들도 있다. 특히 신앙인들이 모이는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4:17~18) 하나님의 심판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심판하고 있고 마지막 종말에도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 환란을 통과하며 어렵게 겨우 구원을 얻는다. 지금도 그렇고 마지막 때도 그렇고 비바람과 홍수, 불로 태우는 심판은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예수의 경고를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여기 본문 내용 중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계명 없이 행하는 자들’ 즉 예수를 믿지만 예수의 계명에는 관심 없는 자들이다. 해당하는 원어 ‘하노미아’는 '법 없이 믿는 자들'이다. 그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표현된 한글개역성경의 번역은 엄밀한 의미에서 오역이다. 어쩌면 오늘 현실의 많은 신자들이 이 원문적 의미에 해당될 것이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 대하여는 그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해야 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 즉 ‘법 없이 행하는 자들’이다.

 

이 말은 요한계시록과 연결시켜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예루살렘의 뚜렷한 특징은 ‘거룩함, 즉 구별됨’이다. 그래서 그렇게 구별받은 우리 신분을 ‘거룩한 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2) 바벨론이라는 곳의 특징은 크고 화려함이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는 표현이 요한계시록에 빈번히 등장하니 곧 세속의 어미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큰 것은 다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야망과 영광을 위해 크게 된 것을 뜻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하나님을 잘 섬겨서 크게 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을 잘 섬겨서 크게 되었다가 나중에 ‘큰 성 바벨론’처럼 타락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야기는 1차적으로 이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말이기에 이 부르심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 급박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사는 세상이 종말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에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처럼 오늘날 세상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라는 이들이 바벨론과 혼합되어 가고 있다. 혼합, 섞임, 즉 바벨론화되어가는 오늘의 흐름들, 그래서 당장은 잘한 선택 같고 잘 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 바벨론의 멸망에 동참할 이들이 될 것이라고 바울은 성경을 통해 경고하고 예언해 왔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2:3) 구약의 롯의 가족들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매우 명확하다. 성경을 아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번 영접한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는 것,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그 남은 자들만이 온전한 신부로 예비되고 준비될 것이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성품과 영광을 드러낼 자로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독교인으로 구별함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성공할 자도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공하든지 않든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이 드러나는가 하는 점이다. 비록 그 창조가 아담의 타락으로 깨어졌지만 둘째 아담의 순종으로 회복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됨이 그분의 강렬한 소망이다. 태초부터 그 목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것만이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에 나는 그 길을 갈 수 있다. 천로역정의 길이 불가능한 길이 아니다.

 

결론

이런 원리를 모르니, 아니 무시하기에 ‘믿었으니 구원은 당연하고 이제는 복 받아 성공해야지!’ 이런 자세들이 만연한 오늘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배도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바알우상숭배가 그랬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믿으면서 산당에 가서는 바알우상도 섬겼다. 불순종하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이 다수인 이 세상에서 그나마 ‘남은 자’가 있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그들 가운데  계속되고 있다. ‘좁은 길을 가는 자,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였듯이, 또한 새 예루살렘 성이 그러하듯이, 그들 남은 자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스며 나오는 것이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