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오래전 기억이지만 한 사람의 행위로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생각과 행동 양식까지 영향을 받았을 만큼 반향을 주었던 그의 행동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절감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작금의 인간 같지도 않은 인사들의 괴기스러운 말들과 행동들을 보면서 같은 인간으로서의 과연 어디까지가 인간일까 하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한다. 어느 쪽 인간이 진짜 인간일까? 유사 이래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는 것이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에 관한 것들이다. 계속 발전하는 철학은 사람과 인생에 대한 학문.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과 인생에 대한 규정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다.
1. 인간은 무엇인가?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얼마나 진기한가? 얼마나 괴물 같고 얼마나 혼돈스러우며 얼마나 모순되고 얼마나 신통한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확실과 오류 덩어리, 우주의 영광이자 수치이다‘ 파스칼뿐이겠는가? 고대 소피스트들에게 외쳤던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일갈 ‘너 자신을 알라’는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해서 모르면서도 인생을 아는 척하는 군상들의 실체를 고발한다. 많은 천재 철학자들이 인간과 인생에 대해 정의하고는 사라졌고 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파고들어 작품들을 남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과 인생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을 관념적 존재라 보았다. 그 관념론적 인간 이해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신이다. 인간의 물질적 육체는 인간의 근본적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소한 부분이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인간에게 있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뿐이라 하였다. ‘육체는 정신의 존재에 방해만 될 뿐, 이 육체를 벗어나야 인간은 고급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러니 영혼의 불멸성을 말하면서 인간의 육체 부활은 부인하였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오직 물질적 존재로만 보는 이들도 있다. 그 물질론적 인간 이해자들은 정신적 인간 이해자들과 반대로 말한다. ‘인간은 오직 물질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신이나 감정, 영적이란 것들은 인간의 물질적 구성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창조주라는 존재도 부인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식도 없다. 인간은 사회구조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악이라는 것도 그 구조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에 그 사회구조의 변경을 통해 악은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은 자기가 행하는 악에 대하여 1차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신에 사회가 져야 한다. 인간이란 한 인격적 개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가치가 있다.’ 이 견해의 구체적 실천이 공산사회의 출발을 야기했음을 역사에서 경험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인간은 환경과 배경에 의해 그 존재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 환경결정론적 인간주의자들은 말한다. ‘인간을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행위를 결정짓는 요소는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환경에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니 그 환경이 완전하게 그 인간에게서 인지된다면 그 인간 행위는 예측될 수 있다.‘
2. 성경에서 말하기를
종합해 보면,한쪽은 인간의 이성, 정신,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고 다른 한쪽은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만을 절대화하고 있다. 칸트 이후로, 사람들은 존재론보다 인식론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인간이 무엇이냐 보다는 지식이 무엇인지, 그 지식의 기초는 무엇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세계 1, 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인간은 선하고 가치 있는 중요한 존제이다’라고 믿었다. 그러나 두 번의 잔혹한 세계전쟁으로 이 믿음은 흔들렸고 염세적 허무주의까지 발흥하였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인생에 대한 정의는 복잡한 양상으로 빠져들었다. 더구나 과학 발달로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의 새로운 발견들은 인간성을 상실케 하였다.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낙태, 유전공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에 대한 존엄성도 사라져 가고 있다.
오늘날 인간 존엄이 와해되고 탈가족, 인격 해체의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서 정의하는 인간관을 읽어 본다. 그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인간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는 존재’라는 것,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기본 전제이다. 죄와 악의 문제, 인간이 누구인지, 왜 오늘의 현실을 사는지,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성경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것에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간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또는 독립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창조자에 의해 피소된 존재임을 선언하며 출발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여로 창조하시고’ (창1:27)
그리고 그 인간이 포함된 만물 또한 하나님께 의존된 관계를 갖고 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9:6)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숨도 쉴 수 없는 존재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지만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 여기 ‘형상’이라는 원어 ‘첼램’은 ‘자르다’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모양’이란 원어 ‘데무쓰’는 ‘비슷하다’는 말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자르고 깎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을 지닌 존재임을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의 처음은 순결했고 죄가 없었으며 거룩하였다.
3. 인간의 하나님 형상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는 존재였고 만물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피조물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그 ‘하나님의 형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주석가들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설명한다. 넓은 의미로는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다양한 관계에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나님의 소명에 반응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부여된 상태이다‘라고 한다. 인간의 이성, 합리적 능력은 하나님의 이성을 방영함이고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함이며 사회적인 교제를 할 수 있음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교제를 반영함이라는 것,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음도 하나님의 결정 능력을 반영함이요 미적 감각도 웅대한 자연경관을 만들어 낸 하나님의 미적 감각을 닮음이라는 것이다.
좁은 의미로는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 특성들’을 말한다. 진짜 지식, 의로움, 거룩함 등, 기능적 측면으로의 하나님 형상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0) 인간이 새 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은 잃어버렸던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 모두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닮아 있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되었나? 물론 타락한 이후의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창9:6)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로 이제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오히려 인간을 구하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땅을 보존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왜?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부패되어 가면서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인간은 무엇이고 더구나 구원받은 인간은 또 어떤 존재인가? 구원은 그 소멸되어 가는 이전의 하늘 백성, 하나님 형상으로의 회복이다. 우리가 그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 있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이다. 그럼에도 잔존해 있는 악한 속성들과 내 나약함이 그 회복을 훼손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3:9)
결론
여기 ‘지음을 받았다’는 원어 ‘게고노타스’는 완료분사형이다. 고대 헬라어에서 완료시제는 ’계속적 결과를 가져오는 과거 행동‘을 말한다. 즉, 인간은 ’과거 어느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4~25) 이것이 바울만의 고백이겠는가? 하늘 백성으로서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리라.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17:25~27)